日系カナダ人独り言ブログ

当ブログはトロント在住、日系一世カナダ人サミー・山田(48)おっさんの「独り言」です。まさに「個人日記」。1968年11月16日東京都目黒区出身(A型)・在北米30年の日系カナダ人(Canadian Citizen)・University of Toronto Woodsworth College BA History & East Asian Studies Major トロント在住(職業記者・医療関連・副職画家)・Toronto Ontario「団体」「宗教」「党派」一切無関係・「政治的」意図皆無=「事実関係」特定の「考え」が’正しい’あるいは一方だけが’間違ってる’いう気は毛頭なし。「知って」それぞれ「考えて」いただれれば本望(^_-☆Everybody!! Let's 'Ponder' or 'Contemplate' On va vous re?-chercher!Internationale!!「世界人類みな兄弟」「平和祈願」「友好共存」「戦争反対」「☆Against Racism☆」「☆Gender Equality☆」&ノーモア「ヘイト」(怨恨、涙、怒りや敵意しか生まない)Thank you very much for everything!! Ma Cher Minasan, Merci Beaucoup et Bonne Chance 

Route vers la démocratisation de la Corée/Road to Democratization of Korea/한국 민주화의 길/韓国民主化への道・Di-Myonkuwan지명관池 明観①

*지명관(池明観)은 대한민국의 종교정치학자, 평론가, 크리스천이다. 평안북도 태생으로 서울대학교 출신이다. 池 明観(ジ・ミョンクワン、朝: 지명관、1924年 - )は、韓国の宗教政治学者、評論家、クリスチャン。


韓国民主化への道
日本の支配からの解放もつかの間、朝鮮戦争、南北分断のなかの国家建設。軍事政権の下、苦難の日々を隣人はどう耐え、いかにはね返したのか。日本はどうかかわったのか。朝鮮半島の風土から説き起こし、韓国の政治、経済、社会の現代史を、情熱あふれる詩や、資料を織り込んで描く。「近くて遠い国」の歴史は、私たちの歴史でもある。
序章 朝鮮、その山河と人びと
川と岩と山
朝鮮の川は悠然と流れる。しばらく目をこらして見ないと、どこに向かって流れるかその方向が定かでない。朝鮮はやはりアジア大陸の一部であることを思わざるをえない。
朝鮮半島は跳ねる兎の形に似ているといわれた。概して北の方は高く南の方は低い。東海(トンへ동해=日本では日本海)の海岸に迫るような形で北から南へと、朝鮮半島の背骨ともいえる山脈が、走っている。東高西低、全国土の8割が山地という山岳国である。北方の、中国の東北部と国境を接しているところに、朝鮮人が長いこと霊山のようにあがめてきた白頭山(ペクトウサン(2744メートル)백두산 )がそびえている。
北朝鮮(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の領土のなか、中部東海岸近くには名山といわれる金剛山(クムガンサン(1638メートル)금강산)が屹立している。通称「万二千峰」の岩肌が朝日、夕日に映え「万物相」を呈するといわれる。その南、韓国(大韓民国)の領土内にある雪嶽山(ソラクサン(1708メートル)설악산)、五台山(オデサン(1563メートル) 오대산)も、金剛山には及ばなくとも小金剛といわれるほど、そびえ立つ巨大な岩肌が美しい。
*백두산(白頭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화인민공화국 국경에 있는 화산이다. 중국에서는 장백산(중국어 간체자: 长白山, 정체자: 長白山, 통용 병음: Chángbái shān 창바이산[*])이라 불린다. 한민족들에게는 민족의 영산으로 숭앙되어 왔으며, 환웅이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제사를 열었다는 태백산과 동일시되기도 한다.Esperanto語→Pektusan (koree 백두산 白頭山 Monto Pektu), ĉine Ĉangbaj ŝan (長白山 长白山 ĉiamblanka monto) aŭ Baitu estas la plej alta monto de la Montaro Changbai. La alto varias inter de 2.744 ĝis 2.750 m, laŭ diversaj fontoj.
*금강산(金剛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금강군 · 고성군 · 통천군에 걸쳐있는 산이다. 태백산맥에 속한 높이 1,638m의 이 산의 이름 금강은 불교에서 유래했다. 불교에서 금강은 불퇴전(不退轉), 즉 물러나지 않는 진리를 향한 굳은 마음을 뜻한다. 금강은 산스크리트어의 바지라(산스크리트어: वज्र, 번개와 금강석을 모두 가리킨다)를 훈역(訓譯)한 단어이다. 대한민국의 강원도 속초시와는 약 50 km 떨어져 있다. 옛날 정조 김만덕의 꿈이었다는 설도 있다. Françaisフランス語→Les monts Kumgang, ou montagnes de diamant (ainsi appelés à cause du scintillement des monts au lever du soleil), sont situés à 108 km au sud de Wŏnsan, dans le Sud-Est de la Corée du Nord, formant la partie septentrionale de la chaîne des monts Taebaek.
*설악산(한국 한자: 雪嶽山, 영어: Seoraksan, Mt. Seorak)은 강원도 속초시, 양양군, 인제군, 고성군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1,708미터의 산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한라산과 지리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추석 무렵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여름이 되어야 녹는 까닭으로 이렇게 이름 지었다.[1] 해방 및 분단 이후 한국 전쟁 때까지는 이 산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토에 속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에는 대한민국 영토가 되었다. Deutschドイツ語→Der Seoraksan (Seorak-Berg) ist einer der Hauptgipfel des auf der Koreanischen Halbinsel liegenden Taebaek-Gebirges. Er ist mit 1708 Metern Höhe der dritthöchste Berg Südkoreas und für seine außerordentlich zerklüftete Felslandschaft bekannt.
*오대산(五臺山)은 강원도 강릉시와 평창군 및 홍천군 경계에 있는 높이 1,563m의 산이다. 1975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기암들의 모습이 금강산을 보는 듯하다고 해서 소금강, 또 학의 날개를 펴는 형상을 했다고 해서 일명 청학산이라고도 불린다.[1] 조선 후기에는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도 설치되어 오늘날에도 건물은 보존되어 있다. Odaesan, also known as Mount Odaesan or Mount Odae (Korean: 오대산; Hanja: 五臺山), is a South Korean mountain peak in Gangwon, South Korea, standing at the junction of the districts of Gangneung, Pyeongchang, and Hongcheon. At an elevation of 1,563 m (5,128 ft) it is the centerpiece of Odaesan National Park.

そういえば、韓国の首都、ソウルの三面に嶮しくそびえ立ち、屏風のように囲む標高800メートル前後の山々も、その頂上は岩稜である。そして町を包みこむように漢江(ハンガン)が悠々と流れる。北朝鮮の首都、平壌もまた、山と川に囲まれた美しい都市である。そこを流れるのは大同江(テトンガン=대동강)。中国と国境を接する白頭山から西へは鴨緑江(アムノウガン=압록강)、東へは豆満江(トウマンガン=두만강)。豆満江の下流近くではロシアとも国境を接している。はるか南の釜山の港には洛東江が流れこみ、海を隔てて済州島には漢拏山(ハルリ(1950メートル)한라산)がそびえる。
嶮しい山、特に北の中国との国境をはさんで東西に走る山脈と、南北を走る山脈から西や南へと流れる大河のために、朝鮮半島は古代から、北からの絶えざる侵略を受けつつも、自らを防御することができた。こうして朝鮮民族は半島内の生活に甘んじ、その地を「錦繍江山(クムスガンサン=금수강산)」と呼んだ。大陸の荒涼とした景色に比べれば、四季鮮やかな錦のような自然と思えたのであろう。
*한강(漢江, 영어: Hangang 또는 Han River)은 대한민국 강원도 태백시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중부를 동에서 서로 통과해 황해로 유입되는 한국의 주요 하천이다. 태백산맥의 금대봉 정상부 북쪽 비탈에서 발원하여 강화해협 부근의 어귀로 흘러가는 물줄기를 본류로 한다. 대한민국의 관찬 자료집인 《한국하천일람》 2013년 판에 따르면 본류 총연장은 494km[3] 남짓이다.漢江(朝鮮語:한강/漢江 Hangang */?),是朝鮮半島一條主要河流,也是朝鮮半島上第四長的河流,僅次於鴨綠江、圖們江與洛東江[1]。

*대동강(大同江)은 한반도에서 다섯 번째로 큰 강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대흥군의 랑림산맥의 한태령(1,356m)에서 발원하여 평양직할시·남포특별시·황해북도·황해남도를 지나 황해로 흐른다. 강의 길이는 439km이며, 수심이 깊은 편이다. 하류에는 평양직할시가 위치해 있으며, 강 유역에는 고구려 유적지가 많다. 유역 형상은 평행형 유역이다.[1] Polskiポーランド語→Taedong-gang (kor. 대동강) - najdłuższa rzeka w Korei Północnej. Długość rzeki wynosi 439 km, a powierzchnia dorzecza 20 247 km².
*압록강(鴨綠江, 만주어: ᠶᠠᠯᡠᡠᠯᠠ Yalu Ula야루 우라, 중국어 정체자: 鴨綠江, 간체자: 鸭绿江, 병음: Yālùjiāng 야루지앙[*])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 서부를 이루는 랴오닝성과 한반도 북서부의 사이를 흐르는 강이다. 그리고 이강은 주로 북한주민 군인등이 많이 탈북한다 압록강을 넘어서 중국 태국 같은 나라를 거쳐 한국으로 오기도 한다 Lietuviųリトアニア語→Jaludziangas (kin. 鴨綠江, pinyin: Yālù Jiāng) arba Amnokanas (kor. 압록강 = Amnokkang) – upė Kinijoje (Dzilino ir Liaoningo prov.) ir Šiaurės Korėjoje. Prasideda Pektusano ugnikalnio papėdėje, Čangbaišano kalnuose.
*두만강(豆滿江, 만주어: ᡨᡠᠮᡝᠨᠪᡳᡵᠠ Tumen Bira, 중국어 간체자: 图们江, 정체자: 圖們江, 병음: Túmenjiāng 투먼장[*], 러시아어: Туманная 투만나야[*])은 백두산의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되는 강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의 국경을 이룬다. Portuguêsポルトガル語→O rio Tumen ou Duman está situado no leste da Ásia, habitualmente considerado como limite da Península da Coreia.
*한라산(漢拏山[3], 문화어: 한나산)은 제주특별자치도에 있는 해발 1,947.06m, 면적 약 1,820km²의 화산으로, 제주도의 면적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Eestiエストニア語→Hallasan ehk Halla mägi (korea keeles 한라산; Põhja-Koreas 한나산; hääldus mõlemal puhul Hallasan; Hanjas 漢拏山) on uinunud vulkaan Lõuna-Koreas Jeju saarel, Lõuna-Korea kõrgeim mägi (1950 m, mis viimastel andmetel on 3 m madalam ehk 1947 m).


湖南平物語
朝鮮半島の地勢は西と南が低いといったが、西南の湖南地方とりわけ全羅南道の裡里、金堤付近に至ると、万頃平野を中心に湖南平野がくり広がる。韓国の穀倉地帯である。かつては農業が富を生み出す最大の産業であった。古代、高句麗、百済、新羅が対立していた三国時代には、百済が占めていたこの穀倉地帯を手に入れるための長い戦いが続いた。
百済の文化はこのような平野の富の上に栄えた。それは小乗仏教の上に立って華麗な仏教芸術を造り上げた。この百済の文化がもしなかったら、新羅や日本の古代文化も違っていたことだろう。今も全羅南道地方に受けつがれている風流、たとえばあの臓腑をえぐるような唱劇、パンソリや、野菜の漬物、魚介類の塩漬など豊かな文化も、湖南平野の米作の富がもたらしたものであった。
しかしその豊かさゆえに、西南地方の苦しみは絶えることがなかった。660年、百済は新羅と唐の羅唐連合軍によって滅ぼされた。山岳地帯で鍛えられた新羅軍によって、百済の文化は余すことなく破壊された。百済に同盟し、百済の遺民を惜しみなく受け入れた日本の大和朝廷が、記紀の記述で新羅を「蕃国」と見なしたのも故なしとはいえない。

*신라(한국 한자: 新羅, 영어: Silla)는 기원전 57년부터 935년까지 고구려, 백제와 함께 고대 한반도의 삼국 시대를 이끌고 발해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구성하였던 국가로, 세계적으로 오래 존속한 왕조들 중 하나로 꼽힌다.
*백제(百濟), 십제(十濟), 남부여(南扶余)는 대한민국의 고대국가 중 하나로, 신라, 고구려와 함께 삼국 시대를 구성하였다. 시조는 부여·고구려에서 피난한 온조 부족으로 전해지며, 마한 54개 연맹체 중 하나인 십제국으로 시작해 530년경 성왕 때 마한을 정복했다.[5]
*고구려(高句麗, 문화어:고구려 시대, 기원전 37년 ~ 668년)는 한반도 최대 영토의 국가이다.
湖南平野では富があるために、持てる者と持たざるものとの対立も激しかった。封建時代にはもちろんのこと、日本統治の植民地時代にはいっそうそうであった。日清戦争後、日本の大資本家たちは朝鮮平野に進出して、鉱山、鉄道、土地に投資し始めた。財閥が大々的に土地投資したのは、1905年、日本が日露戦争に勝利して朝鮮を保護国にしたときから、1910年、朝鮮を併合した頃までの5,6年間であった。岩崎、細川、大倉、川崎などの資本家が湖南平野で広大な土地を占有した。日本の朝鮮への農業移民も続いた。これは日本の大陸農業移民の始まりであろう。
全羅道地方はその地方出身の抒情詩人たちによって「反乱の地」と詩われた。金芝河(1941年―)は1970年の詩集『黄土』のなかで「灼けつく南は」「拒絶して切られた首が再び叫び、叫んで引き裂かれた腕がまた拒絶する反乱の国」だと詠んだ。
日清戦争の発端となった1894年の東学農民革命も、このような豊かな平野での収奪に耐えかねて立ち上がった貧しい農民の反乱であった。それはまた、忍び寄る日本の侵略への抵抗でもあった。このような抵抗の精神は、日本の支配下に入ると1929年には光州学生抗日運動として噴き出した。それは光州市内における日韓学生の衝突に端を発して全国に拡大した事件であった。1945年の解放以後は、左翼運動がもっとも盛んであった。それは麗水・順天反乱事件(1948年、済州島暴動の鎮圧に出動した一部の軍隊の反乱)にまで及んだ。
かつては富のある所には風流があるとともに収奪による民衆の忍従と反乱が渦まいた。パンソリも高度な芸術性をたたえながら、生きることの恨(ハン・抑えられる側に積もる苦しい心情)と抵抗のパトスを含んで、限りなく哀調を帯びている。解放後もこの豊かな地でこう詩われた。
行くよ 泣いてくれるな 行くよ 空も愁い顔、喉渇く峠越え 息苦しいソウル路 この身売りに行く                          (金芝河『ソウル路』から)
1980年5月には、光州事件が起きた。軍部政権に抵抗して、多数の市民が軍隊によって虐殺された。それは反乱の地、全羅道における悲しい現代史の一章である。しかも1960年代以降近代化の風が吹きまくると、農業は必ずしも富を意味しなくなった。1961年以来、軍部政権は、その実力者の多くが東南地方の慶尚道出身であったために、慶尚道政権といわれた。彼らはその地方を庇護して支持基盤とし、近代化による果実をできるだけ大邱、釜山を中心とした東南地方に集中しようとした。こうして西南部の全羅道地方は疎外されてきた。   
*판소리(영어: Pansori)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아니리(말), 너름새(몸짓-발림)을 섞어가며 구연(口演)하는 일종의 솔로 오페라다. ‘판소리’는 ‘판’과 ‘소리’의 합성어로 ‘소리’는 ‘음악’을 말하고 ‘판’은 ‘여러 사람이 모인 곳’ 또는 ‘상황과 장면’을 뜻하는 것으로 ‘많은 청중들이 모인 놀이판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다.[1]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1], 동학 혁명(東學革命),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또는 동학 농민 전쟁(東學農民戰爭)은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백성의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3차)로 나뉜다.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 ~ )는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으며[1]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이다.[2] 《토지》로 알려진 소설가 박경리의 사위이고 1970년대 유신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이다. 1980년부터는 동서양의 철학과 대한민국의 전통 사상을 아우르는 ‘생명 사상’을 제창하였으며, 시집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시삼백』 등이 있고 회고록 『흰 그늘의 길』과 저서 『김지하 사상전집』이 있다.[3]
*광주 학생 독립 운동(光州學生獨立運動) 또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光州學生抗日運動)은 1929년 11월 3일부터 광주 시내에서 일어난 일본 학생의 한국 여학생 희롱으로 일어난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 간 충돌과 11월 12일 광주지역 학생 대시위 운동을 거쳐, 한편으로는 호남지역 일대로 확산되고, 다른 한편으로 서울을 거쳐서 전국 각지로 확산된 항일 운동으로 1929년 11월 말에서 1930년 3월이나 5월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독립운동을 말한다. 12월에는 경성과 평양, 함경도 등지와 같은 국내 지역과 만주벌판에 위치한 간도 등으로 확산되었고, 1930년 5월까지 전국적인 동맹휴학, 학생 항일 시위로 변모, 발전했다.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또는 여순사건(麗順事件)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전라남도 여수·순천 지역에서 국군 제14연대 소속이자 남로당 소속의 김지회·지창수가 주동하여 일어난 군사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이 가담한 사건이다.

乾いた空気
朝鮮半島の総面積はその近海に散在していた大小3962の島々と合わせて22万1125平方キロである。日本の国土の37万7750キロに比べれば、その59パーセント弱である。それは日本の本州の大きさに比べられよう。しかし朝鮮半島は南北に分断され、南の韓国はその半分に満たない9万263平方キロを占めている。人口は韓国が約4500万、北朝鮮は約2000万を擁している。北朝鮮は、より多く山岳地帯によって占められている。緯度上における朝鮮半島の位置は、北緯が北緯43度1分、南端は済州島の南の馬羅島で33度6分40秒である。第二次世界大戦後、米ソ間の戦後処理過程において朝鮮半島は38度線で南北に分断された。今の南北間における分断線は、その後1950年に起こった朝鮮戦争によって多少変化したものである。東においては38度線の北に、西においては南にと、やや右肩上がりに休戦ラインが走っている。
南北朝鮮といえば、平均気温が南部では摂氏14度、中部では10度であるが、北部の蓋馬高原あたりでは5度以下を刻んでいる。ソウルは1月の初めを中心にかなり寒い。零下7,8度の日が続くが、零下10度以下に下がることはめったにない。しかし風は少なく空気は乾きからっとして、しのぎやすい。時期を定めずに、長雨降ることがあるが、日本のように一定の時期に梅雨がやってくることはない。人体に適する相対湿度は70パーセントといわれるが、各地の年平均湿度は平壌が71・7、ソウルが70・8、釜山が64・6である。戦前、1940年まで京城帝国大学で15年間も哲学を教え、ソウルをこよなく愛した安倍能成は、つぎのように書き記した。
「我我の雨の多い都、東京に比べるならば、京城も亦立派な乾いた都である。ニーチェは天才の生れた都は皆乾燥して居るといって、フィレンツェ、パリなどと一緒にアテーネをも挙げて居る。」(『京城とアテーネ』)
京城はいまのソウル、日本統治下の名称である。安倍は、ソウルは三方を山に囲まれ緑が多く、中国の大陸をへてやってきた人の目にはことのほか懐かしまれる、と述懐した。確かに朝鮮半島の空気は、アジア大陸内部の乾燥地とも、日本のような島々からなる湿度の高い国とも違っている。秋ともなれば半島的特色といおうか、透き通るような紺砦の空が一面に広がる。それは高麗青磁の色に通うものであるといわれてきた。

*아베 요시시게(일본어: 安倍 能成(愛媛県出身, 1883년 12월 23일 ~ 1966년 6월 7일)는 일본의 관료, 교육자이다. 아베 요시토의 여덟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법조인 아베 하카루는 그의 동생이다.
*경성제국대학 혹은 게이조 제국대학(일본어: 京城帝國大學 게이조테이코쿠다이가쿠[*], 영어: Keijō Imperial University)은 경성부에 있었던 대학으로, 일제 강점기때 민간인들의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막으려고 1924년에 일본 제국의 6번째 제국대학으로 설립되었다. 일본 제국의 패망과 함께 한국이 광복된 후 경성대학으로 1945년 개칭되었다가 이후 1946년 서울대학교로 개칭 및 통합과정에서 경성제국대학의 시설 및 교수진 등을 활용하였다.[1] 약칭은 조다이(일본어: 城大) 또는 경성제대였다. 학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한반도 최초의 대학기관이었다.

伝統的な家屋
いまは韓国全体に近代的なアパートが林立しているが、伝統的な家屋といえば金持は瓦ぶき、一般庶民は藁ぶきの家であった。このごろは藁ぶきの家はソウルの南、水原にある民俗村にでも訪ねなければ見ることができない。古風な瓦ぶきの家は、ソウルの山手の方など文化財保護地区で見られる。王宮や地方の官街など古い文化財として保存されている建物の多くは瓦ぶきである。もっとも伝統的な両班(科挙に合格した文武両班を意味したことばであるが、朝鮮の士族といっていい)の家屋と村落は、慶尚北道安東の河回マウル(村)にりっぱに保存されている。それは壬辰倭乱(文禄・慶長の役)の時に領譲政(現在でいえば国務総理)を務めた柳成龍一族が住んでいた、美しい村である。
一般的にいえば、朝鮮の伝統的な家屋は北部地方では鼎厨家屋、中部地方では「字家屋、┐字型家屋、南部地方では一字型家屋であった。これは多分に気候と関係があった。鼎厨家屋の場合は厨房が中心になっていて、内房(母屋)と台所が完全には仕切られていない。台所から内房に直接食膳が運ばれる。中部、南部の家屋には中心に大庁という板間がある。台所を出た食膳は庭にいったん出て、大庁をへて内房に運ばれる。大庁は夏には食事をする場所としても使われる。朝鮮人は古くから食事が冷えることを嫌い、寒い地方では食膳が外の空気に触れるのを極度に避けようとした。このような伝統的な家屋が、現代的なアパートとともに消えていくのはいうまでもない。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년) 도요토미 정권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하여 1598년(선조 31년)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또한 임진왜란은 동북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두 번의 침입이 있어서 제 2차 침략은 정유재란이라 따로 부르기도 한다. 또한 이때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다.
*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였으며, 한성 출신이었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1]하여 그 관직이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발포진 수군만호, 조산보 만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류성룡(柳成龍, 1542년 11월 17일(음력 10월 1일) ~ 1607년 5월 31일(음력 5월 6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의학자, 저술가이다. 본관은 풍산(豊山)[1],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경상도 의성[1]의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간성군수 류공작(柳公綽)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郢)의 차남이다.
*양반(兩班, 문화어: 량반)은 조선 시대 최상급의 사회계급으로 사(士)·농(農)·공(工)·상(商) 중 사족(士族)에 해당한다. 이는 또한 조선에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관료와 관료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자격을 가진 가문, 그리고 사림(士林)이라 불렸던 학자 계층까지 포함하는 조선 왕조 특유의 사회계급이다. 본디, 문관과 무관을 지칭하는 관료적 의미였으나, 반상제가 확립되어가면서 신분상의 의미로 변화하였다. 양반은 토지와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과거, 음서, 천거 등을 통하여 국가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 양반은 경제적으로는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으로서,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직 현직 또는 예비 관료로 활동하거나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닦는 데 힘썼다.[1]
つつじとむくげの花
朝鮮半島の自然を語ろうとすれば、少しは花についても言及しなければならない。いまは韓国のハイウェイに、秋ともなればコスモスの花が延々と咲き乱れる。それが秋空と黄ばんだ綿穂に映えて美しい。しかし朝鮮半島を代表する花といえば、まずは朝鮮山つつじをあげねばなるまい。春になればまだ風が肌寒いころ、山々をつつじが紅に染める。れんぎょうの花も咲く。つつじは、先がけの花として多くの詩人によって歌われた。
私はいやで 行かれる時はことばもなく そうっと、そうっと送ってあげますよ 寧辺には薬山 そのつつじの花を いっぱい腕にかかえて行かれる道にばらまきましょう 行かれる道、一歩一歩 落ちたその花を 軽く踏んで 行かれますように 私がいやで 行かれる時は 死んでも涙など流しません
これは金素月(1902-1935)が1922年に詠んだ『つつじの花』という詩。南北朝鮮ともども長いこと口ずさんできた。寧辺はこのごろ北朝鮮の核施設のことで言及される所。春になればいまも薬山につつじの花が咲き乱れ、全山を紅に染めていることであろう。この時とともに1930年に朴八陽(1905年―。1946年頃、北朝鮮へ)が詠んだ詩、「あまりにも悲しい事実」にも触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の詩には「春の先駆者つつじを詠む」という副題がつけられている。七小節にわたるこの詩から最初の二節と第四小節、そして最後の一部を引用することにしたい。
私に向かってつつじの花を詩えというのですか? この貧しい詩人にその淋しくもか弱い花を 早春、山の谷間に声もなく咲いては ある日、風雨にやおら散り行く花を なんと詩えというのですか? 
詩うにはあまりに悲しい事実ですよ 百日紅(百日草)のように赤く赤く咲くこともない花を 菊の花のように長く長く咲くこともない花を 厳しい風雨にあって散りいく可憐な花を 詩うよりは抱いて泣きますよ (中略)
つつじの花は春の先駆者です それは春のたよりをまっ先に伝える予言者 春の姿を先に描く先駆者です 風雨にやおら散るその淡き花びらは 先駆者の不幸な受難ですよ (中略)
だがつつじの花は来る春を思い浮かべ 吹く風冷たい山の中腹で笑うでしょうよ、話すでしょうよ 「長く長く咲くのが花ではなく、春を先に知るのがほんとうの花だ」と
朴八陽はいわゆる越北した(南北分断とともに38度線の北に行った人は「越北した」といい、南下した人は「越南した」という)詩人である。日本統治下においてこのように、彼はつつじを先駆者の花と詠み、来るべき予知をする人になぞらえた。日本の支配下で解放を待ちわびる人、特に社会主義者をそのように詩ったのであった。北朝鮮は朝鮮山つつじを国の花としている。朴八陽は北朝鮮の体制を択んだ詩人。この詩の内容も思想的に北朝鮮に入れられるものであった。南の韓国では長いこと朝鮮の花といわれてきた無窮花(木槿の花)を国の花としている。夏から秋にかけて路地や野山の至るところで咲いては散り、散っては咲き、無窮に咲き続ける。いかなる逆境にもめげない雑草のようなしたたかさ。それが朝鮮民衆の姿であるといわれた。日本人の桜に対する思いとは違った思いを、つつじやむくげに託してきたわけである。

*김소월(金素月, 1902년 9월 7일 (음력 8월 6일)[1] ~ 1934년 12월 24일)은 일제 강점기의 시인이다.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지만, 호인 소월(素月)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본관은 공주(公州)다. 1934년 12월 24일 평안북도 곽산 자택에서 향년 33세로 병사한 그는 서구 문학이 범람하던 시대에 민족 고유의 정서에 기반한 시를 쓴 민족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진달래(Rhododendron mucronulatum, 영어: azalea 또는 Korean rosebay)는 진달래과에 속하는 낙엽활엽 관목이다. 한국·중국·일본·몽골 북부·우수리 등지에 분포한다.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주화이자, 경기도 수원시와 중국 연길시의 시화이기도 하다.
*박 바양朴八陽(1905 ~) 시인이자 평론가. 아니, Lishui, Jin Lishui. 경기도 수원 군 농가에서 태어났다. 서울 제국 대학교 법학부 졸업. 1921 년 시팬 매거진 '크래들'에서 창작 활동을했다. 1923 년에 그는 진보적 인 문학 그룹 "Yanqunshe"가 창립 한 잡지에 짧은시 "Song of Water"를 출판하여 문학계로 만들었다. 1924 년 서울에서 '동아 일보'기자로 활동했으며 이후 20 년 이상 다양한 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많은 가사시를 출간했다. 그는 Karp의 첫 번째 동맹 자였으며 동반자의 입장에 서서 성향의시를 썼습니다. 1925 년 8 월 노동당 신문 인 노동 신문 부 편집장으로 임명됐다. 1931 년에 출판 된 "진심 한 마음", "나는 땅을 두었다", "Summer Night Street", "Summer Night Sky"와 같은시는 프롤레타리아와 무정부주의 도시 서정을 묘사했습니다. 그는 "나인의 만남"후기의 시인이다. 그의 서정시는 미묘하고 깊고 단순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시집은 "Lishui Poems Copy"이고 편집은 "중국 동북 시인 컬렉션"입니다.

*무궁화(無窮花, Hibiscus syriacus)는 아욱과의 낙엽관목으로, 대한민국의 관습헌법에 의해 나라꽃으로 여겨진다.[1] 또한 산림자원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서 무궁화를 특정하여 무궁화 심기에 노력하고 있다. 중국·인도가 원산지로 알려졌으며, 세계 여러 곳에서 가꾸어지고 있다. 무궁화의 종소명(種小名)이 '시리아쿠스(syriacus)'라고 하여 '시리아'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학계에서는 원산지가 시리아라는 것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학자마다 주장이 다르듯이 명확하지가 않다.

半島の地政学
つつじとむくげを讃えた民衆は、朝鮮半島の苦難に満ちた歴史の刻印をおびていた。アジア大陸には巨大な文明国、中国があった。それを北からうかがっている蒙古族や満州族などいわゆる塞外民族は、中国を制するためには、まず朝鮮半島を率い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った。漢族は中国の唐の時代、668年に新羅が朝鮮を統一して以来、朝鮮民族とのあいだに長い友好関係を保った。朝鮮民族は儒教文化を崇め、塞外民族は未開の民と見なした。中国が塞外民族の侵略を受けたときには、朝鮮半島はいうもそれに巻きこまれた。やがて壬辰倭乱のときのように朝鮮半島は南方からも侵略されるようになった。
朝鮮半島では地政学に大陸勢力と海洋勢力が衝突してきた。それで民衆のあいだでは「鯨の争いでえびの背中が割れる」という諺が生まれた。大国のあいだにはさまれた小国として、悲劇的な運命にさいなまれてきたというのである。近代史においては日清、日露の戦場となり、冷戦体制下では南北分断となった。戦後の歴史でいえば、大陸勢力はソ連と中国、海洋勢力は日本とアメリカであった。そのような運命のなかでも朝鮮民族はよくその生存を保ってきた。同じ言語、同じ文化を連綿と伝えてきた。何よりも国土と文化と伝統を守り抜こうとした民族的な強い意志があったといわねばなるまい。伝統的な民族主義がそれを可能にしたのであった。しかしそれは他国を侵略しようとするよりは、つねに自国を守り抜こうとした意志であった。
朝鮮は中国の先進文明を導入することに懸命であった。文化は高い所から低い所に流れるといわれるが、しかしそれは決して自然的な流れではない。文化を受容する側の強い意志が要求される。朝鮮は歴史的に中国から仏教や儒教を導入することに努め、14世紀末には朱子学を基礎にして、朝鮮王朝(日本では李氏朝鮮と呼ばれてきた)を樹立するに至った。いまの韓国を考えるのにも、朝鮮半島の地政学的または地政文化的なことを念頭におかねばならない。アジア大陸の東端に位置する半島としての運命を、朝鮮民族は今後は失敗することなく自覚的に生きていくことができるのだろうか。

*당[1](唐, 618년 ~ 907년)은 수나라와 오대 십국 시대 사이에 존재한 중국의 통일왕조이다. 수도는 현재의 시안인 장안이었다.
*유교(儒敎)는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0~403) 말기에 공자(孔子)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학(儒學)의 학문을 이르는 말이다. 시조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교(孔敎)라고도 한다.[1] 지켜야 할 인륜의 명분(名分)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하여 명교(名敎)라고도 한다.[2]
*程朱理学,是宋明理學的一派,又稱性理學,有時會被简称為理学,與心學相對。

第1章 分断された国
8・15の日
『朝鮮終戦の記録』(森田芳夫他編)には日本人の目に映った1945年8月15日の朝鮮の表情が多数収録されている。当時京城帝国大学医学部の助教授であった田中正四が、日記に記したソウルの表情を、断片的に拾い上げてみよう。
8月15日、正午、玉音を聞いた。すべてが終わったのだ。新しい苦難の道が待っている。それは昨日までの日本人ではなくなったのだ。新しい日本人、謙虚な日本人として再び起き上がれる日を静かに待た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
8月16日 上海にあった朝鮮仮政府のかつての重鎮、呂運亨が政務総監に会ったという話が伝わってくる。総督府の前では朝鮮人が示威運動を始めたという風説もある。しかしそれらは当然の事であって、今あらためて驚く価値もなさそうである。街には日の丸を まんじにぬりつぶし、四隅に易者の広告みたいな模様の韓国の国旗が氾濫している。電車には屋根の上に迄はいあがり、トラックは人を満載して万歳の叫びをあげながら右往左往している。
8月21日、大詔が発せられて1週間。その1週間を静かにふり返って見ると感慨措く能わざるものがある。余りのことに茫然自失した軍部や官庁が、騒ぎが静まりかけ、朝鮮人が思いの外おとなしいと見ると急に威張りだし、“断乎その威信を示さん”等と妙な布告文を出して、そり返って力んでいるのはコッケイだと評するより他ない・・・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는 1919년 3월 1일 경성부에서 선포된 3·1 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의 망명 정부이다.

*여운형(呂運亨, 1886년 5월 25일 (음력 4월 22일)[1] ~ 1947년 7월 19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겸 저술가이다. 1945년 8월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9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지내기도 했다.
田中正四は「玉音をきいた時は少し涙が出かかった。ポツダム宣言受諾の経緯があきらかになった時はむしろ落ちついていた」と書くほどの比較的冷めた日本人知識人であった。彼は「重大発表」といわれても「正午、玉音」を聞くまでは何が起きるのかまったく知らなかった。一瞬にして時代が変わった。ほとんどすべての日本人にとってそうであったが、朝鮮人にとっても同じことであった。全然状況が知らされない戦争であったがために、新しい事態にどう対応していいのかみんな途方に暮れて、それこそ「右往左往」していた。

*옥음 방송(일본어: 玉音放送 교쿠온호소[*])이란 당시 일본 제국의 쇼와 천황이 무조건항복을 알리는 〈대동아 전쟁 종결의 조서〉(大東亜戦争終結ノ詔書) 줄여서 〈종전 조서〉(終戦詔書)
*광복절(光復節)은 한반도가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로,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국경일 및 공휴일로 법제화함으로써 매년 양력 8월 15일에 기념하고 있다. 해방년도인 1945년을 광복절 원년으로 계산한다.

ソウルの一般市民は「重大放送」の内容は「ソ連に対する宣戦布告」か「日本の降服」かと緊張した。この時代の政治のまっただ中を生きてきた政治家の1人である宋南憲は「解放三年史」のなかで8月15日、終戦、韓国でいえば解放または光復の日の状況をこうのべている。
正午、日本天皇裕仁のふるえる声による歴史的ラジオ放送は雑音のためにはっきりしなかったが、それが日本の敗戦を伝える放送であることは推し測ることができた。それから続いた解説放送と新聞社の貼り紙などで日本が無条件降服して、朝鮮民族の独立が成し遂げられるというのが初めて知られるようになった。ソウルの町はまたたく間に解放の感激で興奮のるつぼと化した。午前中まで見られた国民服やもんぺ姿が消え、隠していた白衣を取り出して着た市民たちが街に溢れでた。
こうして日の丸に青を塗って急造した大極旗(韓国の国旗)を持って町中を「泣きながら走って巡り、一日中電車にぶら下がっては万歳を叫ぶ」のであった。1905年から「三代総監と9代総督」の日本統治は幕を降ろした。宋南憲はこのように8・15の日のソウルを描写しながら、かつて民族主義的作家沈熏(1904-1937年)の1930年の詩『その日が来れば』を引用することを忘れなかった。その最初の一節はこうである。
その日が来れば、その日が来るならば 三角山が起ち上がってふんわりと舞い 漢江の水がひっくり返り湧き上がるその日が、この命が絶える前にきてくれさえすれば、私は夜空を飛ぶ鴉のように鍾路の人砦の鐘を頭にぶっつけて鳴らそう、頭蓋骨がこなごなに砕け散っても 喜んで死ねるのにどうして恨(ハン)などありえよう。

*송남헌(宋南憲, 1914년 4월 11일~2001년 2월 20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인, 통일운동가, 근현대사 연구가이다. 일제강점기 말기 “일제의 패망”을 알리는 경성방송국 라디오 단파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광복 이후 한민당에 참여하였으나 1946년 이후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고 김규식의 비서가 되었다. 이후 좌우합작위원회활동과 민족자주연맹 각주인 김규식 박사의 비서실장 등을 역임했다.

*심훈(沈熏, 1901년 10월 23일 ~ 1936년 9월 16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소설가, 시인, 언론인, 영화 배우, 영화 감독, 각본가로 본명은 심대섭(沈大燮)이다. 경기도 과천군에서 3남 1녀 중 삼남으로 출생하였으며, 아명으로 삼보(三保)나 삼준(三俊)을 사용하였다. 친일 성격을 띠었던 가족들과는 달리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이로 인해 감옥에 투옥되고 학교선 퇴학 처분이 되었다.


日本統治の遺産
しかし解放の感激とはうらはらに朝鮮半島の政治と経済は実に厳しいものであった。一言でいって、民族の運命を民族自身の力で切り拓いていくにはあまりにも無力であったといわねばならない。1945年8月、日本の支配から解放された当時、国民の総財産の80パーセント、製造業資本の94パーセントが日本人の手中にあり、技術者の80パーセントが日本人であった。しかも重工業、電力、地下資源の90パーセント以上が北朝鮮にあった。1930年代以降、日本は朝鮮を大陸侵略の兵站基地としながら、北部を重工業地帯に、南を食糧生産基地と軽工業地帯にしたのであった。
このような国が南北に分断されたわけである。実際、日本の朝鮮支配が退いてその後に残された重大な悪遺産はなんといっても南北分断であった。ソ連軍が、朝鮮の東北部から対日戦線に本格的に参加したのは、1945年8月9日であった。彼らは一路南下して23日には、ソウル北方開城(ケソン)に迫った。ところがアメリカ軍はまだ沖縄に駐留していて、朝鮮半島に上陸するまではかなりの日数が必要であった。そこでアメリカ側は朝鮮半島における日本軍の武装解除のために38度線を提案し、これにソ連側も同意することになった。
この取りきめが正式に明らかになったのは、日本がアメリカ軍艦ミズーリで無条件降服に署名した9月2日のことであった。この日アメリカ軍は、一般命令第1号を通して「満州、北緯38度以北の朝鮮、樺太及び千島列島にいる」日本軍の武装解除は、ソビエト極東軍最高司令官によってなされる、と発表した。



*한반도 군사 분계선(韓半島 軍事分界線, 영어: Military Demarcation Line, MDL)은 한반도의 남북을 분단하여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계를 이루는 지도상의 선이다. 휴전선(休戰線)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分断国家への道
日本の支配を脱して、朝鮮独立へと向かう最初の動きは、民族主義左派ともいうべき呂運亨が招かれて朝鮮総督府の政務総監とあい、つぎのような五つの条件に対する保障をえたことであろう。それは「玉音」放送の直前、8月15日の朝7時50分頃のことであった。
1、 全面的に政治犯、経済犯を即時釈放すること。2、8、9、10月3ヶ月間の食糧を保障すること。3、治安維持と建国のための政治活動に絶対干渉しないこと。4、青年と学生を組織訓練することに対して絶対に干渉しないこと。5、勤労者と農民を建国事業に動員するのに対して絶対に干渉しないこと。
直ちに呂運亨は建国準備委員会を組織した。9月に入っては、国内外で独立運動をしてきた指導者の名を連ねた朝鮮人民共和国を宣布した。しかしそれは、9月8日に上陸してきたアメリカ軍によって、全面的に否定された。10月10日、アメリカ軍政庁のアーノルド軍政長官は「38度線以南の朝鮮の地には米軍政府があるのみで、その他の政府が存在することはできない」と烈しい口調で朝鮮人民共和国の宣布を非難した。アメリカは当分38度線以南の朝鮮をみずからの軍政下に置こうとした。その後、戦後問題を討議するために集まった米英ソの外相によるモスクワ三相会談(45年12月)が明らかにしたように、米英ソ中が後見人となって、朝鮮を5年以内の信託統治に置くことにしていた。一方、朝鮮人民共和国というのは左翼主導の政府であった。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는 1945년 8월 15일부터 9월 7일까지 한국의 군정기에 여운형, 안재홍 등을 주축으로 일본으로부터 행정권(총독부에 5개 항을 요구하며, 치안권 요구)을 인수받기 위하여 만든 조직이다. 한반도 남부에는 여운형과 안재홍 등을 주축으로, 한반도 북부에는 조만식 등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줄여서 건준(建準)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영어: People's Republic of Korea)은 1945년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선포한 조직이다. 이들을 정치적 성향별로 분류하면 민족주의자 9명, 여운형계의 중도좌파가 10명, 그리고 3분의 2 가량이 공산주의자였다. 상징적으로 주석 이승만, 내무부장 김구을 내세우기는 하였으나, 정작 이승만과 김구 본인은 이 단체의 공식 직책을 수락하지 않았다. 이후 여운형도 이 조직에서 사실상 배제되고 극좌파인 박헌영이 주도권을 장악했으나, 남북, 미국, 소련에게 인정받지 못하게 되어 1946년에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해산, 재집결되었다. 조선인민공화국 해체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 영어: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은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독립한 한반도 남부를 미군 제24군단이 1945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다스리던 기간이었다. 한국의 역사에서 이 기간을 미군정기라고 부른다.

モスクワ三相会談の決議によって、四大国が後見する、朝鮮人による朝鮮全体のための臨時政府を樹立するというので、1946年3月、米ソ共同委員会がソウルで開かれた。しかしすでに、信託統治問題で左右政治勢力は先鋭に対立していた。長いあいだ待望してきた独立が、即時独立ではなく信託統治であることを、韓国国民は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かし左翼のほうは、ソ連と立場を同じくする政策からこれを支持した。
米ソ共同委員会の冒頭から、ソ連側は信託統治に反対する右派政党、政治団体や人物を排除しようとし、アメリカ側は北朝鮮の政党、政治団体や指導的人物にはまったく右派が含まれていないことを問題にした。このようにして出発した委員会は、いかなる合意にも達することができず、ついに1947年10月21日、朝鮮問題を国連に移管することにした。アメリカは国連において、モスクワ三相会談の決議を放棄して、国連臨時韓国委員団を設置し、その監視の下で1948年3月末までに、南北において自由選挙を実施、国会を構成し、政府を樹立して、南北から米ソ両軍が撤退するという決議案を提出した。しかしソ連は委員団の北朝鮮への入国を拒んだ。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三國外相會議) 또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三相會議)는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 영국 · 소련의 외무장관 회의이다. 제2차 세계대전 뒤의 일본 점령지구에 대한 관리 문제를 비롯하여 얄타회담에 따른 대한민국의 독립 문제를 거론하였다.[1]

*한국의 군정기(韓國의 軍政期)는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독립이 확정된 한반도를 북위 38도선 이북에서 소련군이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전까지 38도선 이남에서는 미군이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다스린 기간을 총칭한다.


大韓民国の誕生
ソ連軍の対日戦争への参加と、日本軍の武装解除という名分で38度線が引かれるということがなかったら、朝鮮半島における南北分断はなかった。しかし米ソによる冷戦体制の下では、それは避けられなかった。北朝鮮では1946年2月9日、金日成を委員長とした北朝鮮臨時人民委員会が組織され、3月5日には土地改革令を公布して、地主を追放した。続けざまに労働令、女性解放令などを発布して、北朝鮮を実質的に共産化した。
1947年2月22日には北朝鮮人民委員会が成立した。48年4月29日には朝鮮人民軍を創設し憲法も採択した。こういう状況のなかで、共産主義政権によって追われた人びと、またそれに不満を抱く人びとは、数百万も越南、すなわち南下の道を選んだ。そのために南における社会的な混乱はいっそう増大した。アメリカの軍政下で、左右の対立は暗殺や破壊行動まで引き起こしていた。しかも国連の監視による南だけの選挙となると、民族の統一を放棄して南朝鮮単独政府を樹立することになると、これに反対する勢力が大きく台頭してきた。
重慶から帰還した臨時政府系の指導者、金九、金奎植などは南北協商を唱えて38度線を越え、北の平壌で1948年4月19日に開かれた南北会談に臨んだ。そして金日成とともに、外国軍隊の即時撤退と朝鮮人による政府の樹立を唱え、南の単独政府樹立には反対するなどの決議を発表した。だがアメリカがこのような決議を受け入れるはずはなかった。
南では、5月10日に国会議員選挙、7月17日には憲法発布、8月15日には大韓民国樹立が宣布された。初代大統領には亡命先のアメリカから帰国した李承晩が就任した。そこで9月9日、北朝鮮は正式に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の成立を宣布した。
668年、新羅が三国を統一して以来1300年、一つの民族として統一国家をなして暮らしていた朝鮮民族は、ここに南北に分断されてしまった。日本統治下において苦しいときに心を通い合わせた人びとですら、分裂していがみあうようになった。かつて苦しいときの同志愛とか愛国心が、泡のように消えていくようにみえた。日本の支配に対する戦いのあいだ、敵味方を分別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メンタリティが、解放後には同志のあいだに内向したといえるかもしれない。このような指導者に対して、国民は幻滅を感じた。
南においては社会主義者たちに対する弾圧が烈しくなった。朝鮮人や労働者、学生のなかでかなりの数が、越北を選んだ。悲劇的なことには、こういうなかで、極端な左右のイデオロギーに疑問を呈しながら中間的な立場を取ろうとした勢力や人びとは、南北朝鮮からともども排除された。現実的には、北では極左、南では極右、ひたすら体制を支持する者のみが生き残ることができた。中道的な民族主義者は、どちらも許されない存在だった。北では右派、南では左派と決めつけられた。私はかつて南北協商勢力について、つぎのように書いたこと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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