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系カナダ人独り言ブログ

当ブログはトロント在住、日系一世カナダ人サミー・山田(48)おっさんの「独り言」です。まさに「個人日記」。1968年11月16日東京都目黒区出身(A型)・在北米30年の日系カナダ人(Canadian Citizen)・University of Toronto Woodsworth College BA History & East Asian Studies Major トロント在住(職業記者・医療関連・副職画家)・Toronto Ontario「団体」「宗教」「党派」一切無関係・「政治的」意図皆無=「事実関係」特定の「考え」が’正しい’あるいは一方だけが’間違ってる’いう気は毛頭なし。「知って」それぞれ「考えて」いただれれば本望(^_-☆Everybody!! Let's 'Ponder' or 'Contemplate' On va vous re?-chercher!Internationale!!「世界人類みな兄弟」「平和祈願」「友好共存」「戦争反対」「☆Against Racism☆」「☆Gender Equality☆」&ノーモア「ヘイト」(怨恨、涙、怒りや敵意しか生まない)Thank you very much for everything!! Ma Cher Minasan, Merci Beaucoup et Bonne Chance 

재일동포유학생간첩사건(在日同胞留學生間諜事件)/Святлана Аляксандраўна Алексіе́віч+서경식(徐京植)/野人刘连仁⇒日本凌辱虐待逃进北海道深山度过13年/조선적 일본군인(朝鮮籍日本軍人)

学園浸透スパイ団事件(がくえんしんとうスパイだんじけん)とは、ソウル大学校などへ日本の、主として関西地方から留学していた20名近い在日韓国人らが「北朝鮮のスパイ団」であるという国家保安法違反の容疑で中央情報部(KCIA)によって逮捕され、起訴された結果16名が裁判で死刑を含む有罪判決を受けるなどして収監されるに至った事件。韓国では「在日同胞留学生スパイ事件」(韓国語: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と呼ばれる。また、KCIAによって「事件の構図」が公表された日付が1975年11月22日だったことから、「11・22事件」(韓国語: 11.22사건)との通称でも知られる。立件から35年以上を経た2012年5月までの時点で、かつての死刑囚を含む5名に再審で無罪が確定し、その他にも未確定ながら再審の下級裁判所で無罪判決が出され、それらの判決における事実認定などで事件そのものが当局による拷問から生じた虚偽自白などに基づく捏造であったことが濃厚とされるなど、歴史的・大規模な冤罪事件の様相を呈している 。南アフリカにおいてアパルトヘイトへの事後的な解決を図った真実和解委員会の成功を受け、同様の歴史を抱える各国が同様の機関を設置した中、韓国も「真実・和解のための過去事(過去史)整理委員会」を設置して軍事独裁政権の時代に発生した重大な人権侵害の調査・検証を行った結果、この「学園浸透スパイ団事件」も事件そのものが国軍保安司令部(現・国軍機務司令部)による拷問から生じた虚偽自白などに基づいて捏造された冤罪であったと結論された。詳細⇒1975年11月22日、KCIAは韓国の報道機関に対し「在日韓国人の留学生(母国留学生)21名を国家保安法及び反共法違反の嫌疑で逮捕し、検察庁に送致した」と発表し、「事件」の概要を公表した[7]。 冤罪⇒2013年5月には、金大中に対する死刑判決(親北団体「韓国民主回復統一促進国民会議」、通称「韓民統」。現在日韓国民主統一連合の指導者と断じた)の根拠となった供述をした2被告に対しても無罪判決が下り、確定した。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간첩사건(在日韓國民主統一聯合間諜事件) 또는 단순히 한민통간첩사건 혹은 재일동포유학생간첩사건(在日同胞留學生間諜事件)은 1977년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의 간부로부터 지령을 받고 국가기밀을 탐지ㆍ수집했다는 혐의를 적용하여 재일동포 유학생들을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이다. 재일동포 출신으로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김정사와 유성삼은 1977년 4월 보안사에 체포돼 20여일간 불법구금됐다. 1977년 6월 이들은 국가보안법상 간첩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1978년 6월 19일 대법원은 김정사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유정삼에게는 징역 3년 6월을 선고했다. 법원은 이들의 판결을 바탕으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1] 2010년 3월 24일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이 수사기관의 강압적인 수사로 조작됐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김정사는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보안사에 연행돼 장기간 불법 구금상태에서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고 한민통 소속 재일지도원의 지령에 따라 국내에 잠입해 간첩행위를 했다는 등 허위 사실을 자백한 것으로 확인됐다.[2] 서울고법 형사8부는 2011년 9월 23일 이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김정사와 유성삼이 청구한 국가보안법 위반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심 재판부는 이들의 간첩혐의에 대해 “영장 없는 구속과 고문, 계속된 위협으로 이뤄진 자백은 증거가 되지 못한다”며 “김씨가 일본에서 한민통 대표를 만났을 때 그가 대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볼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3] 이 사건은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민통 결성을 준비하고 의장활동을 했다'는 부분에 영향을 미쳐 김 전 대통령의 사형 선고 근거로 이용되기도 했다.[4] 2012년 10월 3일 보안사에 의해 조작된 또 다른 피해자 재일교포 60살 이헌치가 상고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대법원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돼 15년 간 복역한 재일교포 이 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면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자유심증주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국가보안법 위반죄에서의 이적표현물 소지, 재심절차에서의 증거판단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는 등의 위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 건너와 1979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이헌치는 1981년 10월 보안사 수사관에 의해 영장 없이 체포돼 '고문 수사'를 받았다.[5] 徐勝(ソ・スン、서승、1945年 4月3日-)は、在日韓国人2世。立命館大学特任教授。立命館大学コリア研究センター研究顧問、靖国反対共同行動韓国委員会共同代表。専門は、比較人権法、東アジアの法と人権、現代大韓民国の法と政治。北朝鮮工作員[1][2]との容疑で韓国で共に逮捕された人権運動家の徐俊植、作家で東京経済大学教授の徐京植は実弟。英語⇒Suh Sung (born 1945) is a former South Korean political prisoner. Early life and arrest⇒Suh was born in 1945 in Kyoto, Japan to Zainichi Korean parents. He attended school in Japan until 1970, and then went to South Korea to continue his studie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in 1971, during the regime of Park Chung-hee. In March 1971, upon returning to South Korea from a trip to Japan to see his family, Suh was arrested and put in prison for 19 years. While in custody and under heavy interrogation and torture, Suh Sung lit himself on fire, but survived. Later careerSuh is currently Professor of International Studies at Ritsumeikan University in Japan. His autobiography Unbroken Spirit discusses his life as a political prisoner.[1]徐俊植(서준식、1948年5月25日 - )は、在日韓国人の社会運動家。徐勝は兄、徐京植は弟。 1948年、京都市に生まれる。京都府立桂高等学校を卒業後韓国に留学、ソウル大学校に学ぶ。1971年、兄の徐勝とともに学園浸透スパイ団事件の容疑者として逮捕さ 懲役7年の刑をうけ服役する。なお、事件はのちに捏造である可能性が濃厚であるため、彼もまた冤罪であった可能性が高いとされている(リンク先を参照)。서준식(徐俊植, 1948년 ~ )은 일본 출생의 대한민국 진보 인권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이다. 1971년 소위 유학생 형제 간첩단 사건으로 투옥되어 7년을 복역하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향을 거부한 이유로, 10년을 더 복역하고 1988년에 출감하였다. 인권운동사랑방 대표를 역임했다. 생애충남 출신인 서준식의 부모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뒤 1948년 일본 교토 시에서 서준식을 낳았다. 서준식은 1967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대한민국으로 유학을 와서 1968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1970년 방학 중에 일본에 머물던 그는, 1968년에 서울로 유학 와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그의 둘째 형 서승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를 빌미로 그와 서승은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1971년에 보안사령부에 체포되었으며, 1972년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을 판결받았다. 그러나 1978년 5월 27일에 징역 7년 만기를 채웠음에도 1975년에 제정된 사회안전법이 소급적용되어 ‘사상 전향’을 거부함으로써, 석방되지못하고 청주감호소에 이감되어 이후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호감호 처분이 내려져 10년을 더 감옥에 있어야먄 했다. 연대기 徐 京植(ソ・キョンシク、서 경식、1951年 - )は、在日朝鮮人作家、文学者。東京経済大学現代法学部教授(現代アジア思想 )。京都市生まれ。早稲田大学文学部卒業。兄に立命館大学特任教授の徐勝、人権運動家の徐俊植がいる。本人は4人兄弟の末っ子。来歴 在日朝鮮人の父母のもと、京都市に生まれる。早稲田大学在学中の1971年、二人の兄が留学中のソウルで国家保安法違反容疑で逮捕される(学園浸透スパイ団事件)。すぐさま逮捕の不当性を訴えて母や支援者とともに救援活動を展開。1974年に早稲田大学第一文学部仏文学科を卒業するも、依然兄弟は獄中にあり、自らも進学を諦めて兄の解放と韓国民主化運動のため活動を継続する。この活動中に母を亡くす。 投獄から17年目の1988年に徐俊植が釈放され、1990年には徐勝も釈放。長期にわたる救援活動の経験は、その後の思索と文筆活動へとつながっていく。この頃より都内の大学などで「人権」や「マイノリティ」をテーマとした講義を持っている。2000年、東京経済大学助教授に就任。2009年に同教授。 作家としての活動は多岐にわたるが、その原点は兄2人の救出活動の経験と共に、在日朝鮮人としての自身のアイデンティティにあるとされる。自叙伝『子どもの涙 - ある在日朝鮮人の読書遍歴』(1995年)は日本エッセイストクラブ賞を受賞。以後、ディアスポラ(離散者・難民)をめぐる諸問題に多角的考察を試みる著作活動を展開。『プリーモ・レーヴィへの旅』(1999年)にてマルコ・ポーロ賞を受賞。ほぼ毎年何らかの著作を上梓し続けるなど、精力的な活動を行っている。 2004年には高橋哲哉らと季刊の思想雑誌『前夜』を刊行し、呼びかけ人、編集委員をつとめた。2006年より2年間、韓国留学を果たしている。2011年から、韓国の新聞ハンギョレに没落する日本の様子を報告する連載「日本通信」を開始した[1]。 서경식(徐京植, 1951년 ~ )은 재일 조선인 저술가이자 작가이다. 2008년 현재 도쿄 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이다. 리쓰메이칸 대학 교수인 서승과 인권운동가인 서준식의 동생이다.생애 교토 시에서 태어났다. 와세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71년, 대한민국에서 공부하던 두 형이 서울에서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당시 서승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과정에, 서준식은 같은 학교 법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한차례 방북 사실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서승은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서준식은 7년형을 선고받았다.[1] 곧바로 체포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어머니와 그들을 돕는 사람들과 함께 구호 활동을 폈다. 1974년 와세다 대학 프랑스 문학과를 졸업했으나 여전히 형들이 옥중에 있어 진학을 포기하고 형들의 석방과 한국 민주화 운동을 위한 활동을 계속한다. 그사이 어머니는 1980년에 사망했다. 투옥 17년째인 1988년에 서준식이 석방되고 1990년에는 서승도 석방되었다. 장기적인 구호 활동의 경험은 이후의 사색과 문필 활동으로 연결되었다. 인권과 소수 민족을 주제로 한 강연 활동을 많이 펼쳐 왔다. 2000년에 동경경제대학 부교수가 되었다. 작가 활동은 다방면에 걸쳐 있으며 그 근원은 형 2명의 구출 활동 경험과 함께, 재일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부터 2년간 대한민국에 머물렀다. 単著
『長くきびしい道のり 徐兄弟・獄中の生』(影書房、1988年)
『皇民化政策から指紋押捺まで 在日朝鮮人の「昭和史」』(岩波書店、1989年)
『私の西洋美術巡礼』(みすず書房、1991年)
『「民族」を読む 20世紀のアポリア』(日本エディタースクール出版部、1994年)
『子どもの涙 ある在日朝鮮人の読書遍歴』(柏書房、1995年;小学館文庫)
『分断を生きる 「在日」を超えて』(影書房、19997)
『新しい普遍性へ 対話集』(影書房、1999年)
『プリーモ・レーヴィへの旅』(朝日新聞社、1999年)
『過ぎ去らない人々 難民の世紀の墓碑銘』(影書房、2001年)
『青春の死神 記憶のなかの20世紀絵画』(毎日新聞社、2001年)
『半難民の位置から 戦後責任論争と在日朝鮮人』(影書房、2002年)
『秤にかけてはならない 日朝問題を考える座標軸』(影書房 2003年)
『ディアスポラ紀行 追放された者のまなざし 』(岩波新書、2006年)
『夜の時代に語るべきこと ソウル発「深夜通信」』(毎日新聞社、2007年)
『汝の眼を信じよ!-統一ドイツ美術紀行』(みすず書房、2010)
『在日朝鮮人ってどんな人?』(平凡社、2012年)
『植民地主義の暴力 -- 「ことばの檻」から』(高文研、2013年)共著
『二〇世紀を生きた朝鮮人「在日」から考える』(林哲,趙景達共編著、大和書房、1999年)
『断絶の世紀・証言の時代 戦争の記憶をめぐる対話』(高橋哲哉共著、岩波書店、2000年)
『石原都知事「三国人」発言の何が問題なのか』(内海愛子・高橋哲哉共編、影書房、2000年)
『教養の再生のために 危機の時代の想像力 東京経済大学21世紀教養プログラム発足記念講演会』(加藤周一、ノーマ・フィールド共著、影書房、2005年)
『ソウルーベルリン玉突き書簡 境界線上の対話』 多和田葉子 (岩波書店、2008年)
『「慰安婦」問題の現在―「朴裕河現象」と知識人』前田朗編(三一書房、2016年)
訳書
徐勝・徐俊植『徐兄弟獄中からの手紙 徐勝,徐俊植の10年』(岩波新書、1981)
知恵の時代のために 現代韓国から 白楽晴・李順愛共訳 (オリジン出版センター、1991年)
ダニエル・エルナンデス=サラサール『グアテマラ ある天使の記憶』(影書房、2004年)

尹伊桑(韓語:윤이상,1917年9月17日-1995年11月3日),是一位朝鮮出生,在德國活躍的著名音樂家、指揮家。他的作品通行世界,被誉为20世纪亚裔著名作曲家之一。윤이상(尹伊桑, 독문명: Isang Yun, 1917년 9월 17일 ~ 1995년 11월 4일)은 서독과 통일 독일에서 활동한 대한민국 출신의 현대 음악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기타리스트, 첼리스트이다. 본관은 칠원이며 독일식 이름은 Isang Yun(이장 윤)이다.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하였고 경상남도 통영군 충무면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이후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에서 성장하였다. ドイツ語→윤이상(尹伊桑)Isang Yun (* 17. September 1917 nördlich der Hafenstadt Tongyeong, Keishō-nandō, Provinz Chōsen, damaliges Japanisches Kaiserreich, heutiges Südkorea; † 3. November 1995 in Berlin) war ein deutscher Komponist koreanischer Abstammung.
スヴェトラーナ・アレクサンドロヴナ・アレクシエーヴィッチ(ロシア語: Светла́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Алексие́вич, ベラルーシ語: Святла́на Алякса́ндраўна Алексіе́віч, 英語: Svetlana Alexandrovna Alexievich, Svyatlana Alyaksandrawna Alyeksiyevich、1948年5月31日 - )は、ベラルーシの作家、ジャーナリスト。「スヴェトラーナ・アレクシエーヴィチ」、「スベトラーナ・アレクシエービッチ」表記もある。2015年ノーベル文学賞受賞。ベラルーシ(白ロシア語)⇒Святлана Аляксандраўна Алексіе́віч (31 мая 1948, Станіславаў, цяпер Івана-Франкоўск, Украіна) — беларуская журналістка, пісьменніца.[5] Піша на рускай мове. Лаўрэат Нобелеўскай прэміі па літаратуры (2015)[6] «за шматгалосую творчасць — помнік пакутам і мужнасці ў наш час».フランス語→Svetlana Aleksandrovna Aleksievitch (en russe : Светла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Алексиевич, en biélorusse : Святлана Аляксандраўна Алексіевіч, Sviatlana Aliaksandraŭna Aleksievitch) née le 31 mai 1948 à Stanislav1, est une personnalité littéraire et journaliste russophone soviétique puis biélorusse2, dissidente soutenue par le PEN club et la fondation Soros. Le 8 octobre 2015, le prix Nobel de littérature lui est attribué pour « son œuvre polyphonique, mémorial de la souffrance et du courage à notre époque »3, ce qui fait d'elle la première femme de langue russe à recevoir la distinction4. Les précédents russophones lauréats du Prix Nobel de littérature sont Ivan Bounine (1933), Boris Pasternak (1958), Mikhaïl Cholokhov (1965), Alexandre Soljenitsyne (1970), Joseph Brodsky / Yossip Brodsky (1978). イタリア語→背景=BiografiaÈ nota soprattutto per essere stata cronista, per i connazionali, dei principali eventi dell'Unione Sovietica della seconda metà del XX secolo: dalla guerra in Afghanistan, al disastro di Černobyl', ai suicidi seguiti allo scioglimento dell'URSS. Su ognuno di questi particolari argomenti ha scritto libri, tradotti anche in varie lingue, che le sono valsi la fama internazionale e importanti riconoscimenti[1]. Con le sue opere tradotte in molte lingue, si è fatta conoscere in tutto il mondo: La guerra non ha un volto di donna (sulle donne sovietiche al fronte nella seconda guerra mondiale), Ragazzi di zinco (sui reduci della guerra in Afghanistan), Preghiera per Cernobyl' (sulle vittime della tragedia nucleare)[2], Incantati dalla morte (sui suicidi in seguito al crollo dell'URSS).Nata nell'Ucraina occidentale da padre bielorusso e madre ucraina, è cresciuta in Bielorussia, dove ha vissuto finché, perseguitata dal regime del presidente Aleksandr Lukašenko, è stata costretta a lasciare il Paese perché su di lei gravava l'accusa di essere un'agente della CIA[3]. Dopo un periodo di lontananza dalla Bielorussia, trascorso prevalentemente tra Italia, Francia, Germania e Svezia, nel 2011 è tornata a vivere a Minsk[3].L'8 ottobre 2015 è stata insignita del Premio Nobel per la letteratura, "per la sua scrittura polifonica, un monumento alla sofferenza e al coraggio nel nostro tempo". Quattordicesima donna a ottenere il prestigioso riconoscimento, è la prima persona bielorussa a vincerlo e la seconda persona di origini ucraine, dopo Shmuel Yosef Agnon (vincitore nel 1966). ドイツ語→Swetlana Alexandrowna Alexijewitsch (* 31. Mai 1948 in Stanislaw, Ukrainische Sozialistische Sowjetrepublik, heute Iwano-Frankiwsk) ist eine weißrussische Schriftstellerin. 2015 wurde ihr „für ihr vielstimmiges Werk, das dem Leiden und Mut in unserer Zeit ein Denkmal setzt“, der Nobelpreis für Literatur zugesprochen. Sie schreibt in russischer Sprache. Laut eigener Aussage reichen ihre Kenntnisse der weißrussischen Sprache nicht aus, in ihr zu schreiben.[1]Alexijewitsch befasst sich mit unterschiedlichen literarischen Genres wie Kurzgeschichten, Essays und Reportagen und hat eine Methode entwickelt, mit der literarisch eine größtmögliche Annäherung an das wahre Leben gelingt, in der Form einer Zusammenfassung individueller Stimmen als Collage des tagtäglichen Lebens.[2][3]ロシア語⇒Нобелевская премия В 2013 году Светлана Алексиевич считалась одним из претендентов на Нобелевскую премию по литературе[37], однако премию получила канадская писательница Элис Манро.В 2015 году Алексиевич стала лауреатом Нобелевской премии по литературе с формулировкой «за её многоголосное творчество — памятник страданию и мужеству в наше время»[6][38]. Светлана Алексиевич — первый нобелевский лауреат в истории независимой Белоруссии; она стала первым с 1987 года русскоязычным писателем, удостоенным Нобелевской премии по литературе[39]. Впервые за полвека премия была присуждена писателю, преимущественно работающему в жанре документальной литературы; при этом впервые в истории Нобелевская премия по литературе присуждена профессиональному журналисту[40]. Денежный приз премии составил 8 млн шведских крон (около 953 тыс. долларов на момент присуждения)[41]. 




















刘连仁 刘连仁是山东省高密市井沟镇草泊村人,1913年生。1944年9月的一天上午,刘连仁在村子里被3个日本鬼子抓住,用绳子绑上,用枪押着,离开了故乡。当时刘连仁的妻子已有7个月的身孕。他做梦也想不到,这是日本军国主义设计的一条毒计,通过所谓的“移入华工方针”到中国四处抓人,到日本做奴隶。2013年4月7日,刘连仁100周年公祭活动在其家乡山东省高密市草泊村举行。人物生平 刘连仁和其他被抓的人一起被押到了高密县城,一路上日本鬼子见了青壮年男子就抓 已有100多人被关押在日本人的合作社里。第二天早上,日本鬼子就用刺刀押着他们上了火车。在车上100多人被挤在一个车厢里,别说蹲不下,转个身都没有余地,大家挤成一团直挺挺的站着,车门口有拿枪的日本兵守着,上厕所也要用绳子牵着。自从被抓的那一刻,一种恐惧、愤怒、思念始终撞击着刘连仁这颗忠厚善良的心灵,一个靠种田为生的汉子,面对日本军国主义的侵略,面对刺刀和绳索,怎么不恐惧和愤怒。自从被抓,没有见到自己的亲人,从此自己的父母双亲和弟妹怎样生活,自己的妻子快要临产了,遭到这种变故孩子不知是否保住,什么时候回来,这一切的一切让刘连仁柔肠寸断,痛不欲生。 死亡队伍 火车到了青岛,被关押的人更多了,有山东的、河北的,他们被强行换上黄军装、照相、按手印,被押上的开往日本大货船。在船上,八百多人全被赶进下层大统舱,舱门一关,里面黑沉沉的,地上是矿石,坐上去刺屁股,舱里闷得发慌,没有水,发动机轰鸣阵耳,船身摇晃得厉害,叫人头晕,中午每人发了一个又黑又硬的小窝窝头,他们自从被抓就没有吃过象样的东西,饿是自然的,这时候拿着窝窝头偏偏吃不下,一是啃不动,二是晕船。船行6天,到达日本,又把他们说成是俘虏兵。用火车把他们押到了目的地——日本雨龙郡沼田村明治矿业公司昭和矿业所。在昭和矿业所,刘连仁被分到矿井里钻煤。这里就是活地狱,干活又脏又累又险,一天干10多个小时,完不成任务不准收工,没有安全设备,不准洗澡,没多久大家身上长了芥疮。干活比牛马还重,吃的不如牛马,有时饿的头晕腿软。刘连仁他们拼命的干,日本人还嫌慢,不满足就打人,打起人来没轻没重,木棒、铁棍、铁锨、铁镐,抓到什么就使什么打。矿井象野兽一样张着漆黑的大口,无情吞噬着矿工的生命,塌方、透水、瓦斯爆炸等事故时常发生,矿工伤亡不计其数。在日本鬼子的刺刀底下,挨饿受冻、挨打挨骂、担惊害怕,被打死、饿死、冻死、病死的人很多,活下来的一个个容颜消瘦、双目无光、全身无力、双腿发软,这支中国劳工队伍是一支“死亡队伍”。被人发现编辑 1958年1月底的一天,刘连仁正待在洞里,大雪把洞口几乎封住,只留下很小的一个小口子。他突然听到脚步声,吓了一跳,怎么这样大的雪天还有人。说时迟,那时快,就听“扑通”一声,雪洞上端塌下来,一个人的脚伸了进来,这只脚在洞里四面打探,没碰着东西,把脚缩上去。过了一回,那人慢慢地走远了。刘连仁想,肯定被人发现了,与其在洞里等死,不如冒死逃跑。他爬出洞来,鹅毛般的雪花刮在脸上象刀割一样,他的腿在山洞里别了一冬,已几乎不会走路,再加上风大雪大,更走不动。为了活命,他拼命的跑,就这样在雪地里熬了十多天,手脚被冻裂,全身骨头疼痛难忍,饿得要命,没有办法他又回到洞里。来的人是日本的一名猎户,过了十几天,猎户又发现了脚印,便领着两名警察来到了洞口,向天鸣枪,向洞里喊话,没敢进洞,而是在洞口的不远处守候。刘连仁在洞里没敢出声,等他们走后,又一次逃出洞来,但是没走多远就被人抓住了。回到祖国编辑 刘连仁的消息发表后,震惊了日本。祖国人民对刘连仁十分关切,中国红十字会立即打电报给日本,留日的中国华侨总会、日本日中友好协会等团体和许多日本友人把刘连仁保护起来,解决了衣食住行,治病养伤,帮助刘连仁证实了身份。祖国人民给刘连仁发去了慰问信和慰问金。这些使刘连仁无比高兴,更加想念祖国和亲人,恨不得插上翅膀飞回祖国。
1958年4月15日,刘连仁乘坐日本轮船“白山丸”号,回到了日思夜想、离别十四年的祖国。在天津塘沽码头,刘连仁受到了热烈的欢迎。在欢迎仪式上,有中国红十字会的负责人、天津市政府的首长、各界代表和数以千计的群众,更使他没有想到的是还有他的妻子、弟弟、和没见过面的孩子。刘连仁哭着被掳到日本,笑着回到了祖国。从天津到济南又到高密老家,刘连仁看到了祖国的欣欣向荣,受到了党和政府及人民群众的热烈欢迎,感到了祖国人民和家人的亲切关怀,激动兴奋的心情无一言表。回乡后他积极参加农业生产,先后被选为公社党委委员、村主任,还担任了高密县政协委员、人大代表和潍坊市人大代表等多种职务。在党和政府的关怀下,刘连仁和子女生活在一起,度过了幸福的晚年。历史见证编辑 刘连仁的十四年苦难生活,是日本军国主义者违反国际法,残害中国人民的活生生的罪证,是一部用血和泪写成的控诉书。刘连仁罕见的苦难经历在中日两国及世界爱好和平的人们当中引起轰动。生前,他到省内外作报告达1800余场次,使数10万人受到生动的爱国主义教育;先后6次出访日本,向日本人民揭露日本军国主义的罪行。为讨回公道,1996年3月,在全国人民的支持和日本友人的帮助下,刘连仁向仍然不认罪不赔偿的日本政府提起诉讼,并3次赴日上法庭陈述。2001年7月12日,刘连仁全面胜诉,被告日本政府被判赔偿2000万日元。这是饱受日本侵略战争之苦的中国人对日索赔成功的第一例,必将对全国各地的战后赔偿诉讼产生重大影响。2001年7月,日本东京地方法庭判决日本政府违反战后救济义务,应当向刘连仁的遗属提供2000万日元的损害赔偿。但是,4年后,日本东京高等法院推翻这一判决,驳回刘连仁索赔请求。2007年,日本最高法院三审驳回原告诉求,此后不再受理。 人物逝世编辑 2000年9月2日,刘连仁因癌复发医治无效去世,享年87岁。野人刘连仁 早年,他被强掳日本做苦役,受尽百般凌辱虐待,逃进北海道深山,度过13年茹毛饮血的“野人”生活;晚年,他毅然状告日本政府,打起了艰难的跨国官司并一审胜诉,成为中国被掳劳工讨取公道的一面旗帜……




劉 連仁〈聯仁〉(りゅう れんじん 、1913年 - 2000年9月2日) は、現在の中華人民共和国山東省高密市生まれの華人労務者。山東省の故郷に家族と共に暮らしていたが、1944年9月、大東亜省によって華人労務者として拉致(誘拐)され、日本に強制連行。北海道雨竜郡沼田町の明治鉱業昭和鉱業所へ炭鉱奴隷労働者として送り込まれた。 1945年7月、仲間の労働者4人と共に脱走を図る。直後に仲間は次々と脱落していったが、以後13年間、ただ一人終戦を知らないまま山中を逃避行し続けた。1958年2月8日、当別町の山中で穴ぐらの中に潜んでいる姿を農民が発見、保護された。その後、故郷へ帰国。1996年、東京地裁に強制連行であったとして日本国を相手取り提訴したが、2000年、判決を聞かないまま本人が死去。裁判は劉の息子を原告として継続され、2001年に地裁では勝訴するが、日本 国は控訴。2005年、東京高裁は訴えを棄却。
関連文献・資料
欧陽文彬、『穴にかくれて14年―中国人俘虜劉連仁の記録』、新読書社、1959年 (三省堂版1972年、新読書社新装版2002年 ISBN 4788050153 )
早乙女勝元、『穴から穴へ13年―劉連仁と強制連行』、草の根出版会、2000年 ISBN 4876481555
野添憲治、『劉連仁・穴の中の戦後―中国人と強制連行』、三一書房、1995年 ISBN 4380952894
たかしよいち、『北の逃亡者―中国人強制労働の悲劇』、理論社、1989年、ISBN 4652018444

朝鮮籍日本兵指日韓合併條約時代日本在朝鮮半島招募的士兵,為日本帝國利益作戰。募集
采用条件 思想坚固,身躯强健,精神正常者
[1] 不采用民族主义者、共产主义者或亲戚家族里有跟該等活动有关的人[2] 志愿目的 朝鮮人陸軍特別志願兵 1943年1月 “我为朝鲜独立志愿陆军特别志愿军,体会武力,准备好将来的革命起义” [3] “朝鲜人做为志愿军非常好,我们将来利用志愿军就行了,听说志愿军比日本人优秀,优秀的部队必定将为了祖国起义,所以不应该否认志愿军” [4] “应募者不一定是自愿来应募,因警察强制性地劝诱不可奈何来应募而已。”“应募者只有没文化的农村青年,有学知识者不愿意来应募,倒不如在躲避这现状。”“只为了好条件,走功利主义,为了退休后的自我条件来应募而已。”朝鮮人日本兵(ちょうせんじんにほんへい)は、大日本帝国陸海軍(旧日本軍)に所属し軍務に服した、朝鮮人の軍人。俘虜監視員など軍人に近い任務を行った軍属も含むことがある。 조선적 일본군인(朝鮮籍日本軍人) 또는 조선인 일본병(일본어: 朝鮮人日本兵 ちょうせんじんにほんへい 초센진니혼헤이[*]) 또는 조선계 일본군인(朝鮮係日本軍人)은 일본 제국 육해군에 소속되어 군무원으로 복무한 조선인 군인, 포로 감시원 등 군인에 가까운 임무를 수행한 군속 등이며, 그 중에서도 적극적인 협력자를 가리켜서는 조선인 BC급 전범(朝鮮人BC級戰犯)이라고도 부른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군과 연합군에 의해 BC급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이나 무기징역 등의 처벌을 받았다.개요 처음에 육군에 조선인이 대규모로 도입된 것은 1910년에 창설된 헌병보조원 제도에서였다. 헌병 보조원은 육군 일등을 졸업하고, 이등 졸업에 준하는 처우를 받을 수 있는 군속이었다. 1919년에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되면 헌병보조원은 조선총독부 경찰의 경찰관으로 전관되었다. 1938년에 육군 특별지원병 제도, 1943년에 해군 특별지원병 제도가 각각 도입되었다. 특별지원병 제도 시행 이전에는 조선인이 일반 사병으로 육해군에 입대할 수 없었으며, 조선인 일본 군인은 홍사익으로 대표되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한 자, 이병무처럼 구 대한제국 군대에서 조선군인으로서 일본 제국 육군에 전입한 자에 한정되어 있었다. 또한 일본 해군사관학교, 해군기관학교 등 해군 사관을 양성하는 여러 학교는 시종 조선인의 입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4년부터 징병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군인, 군속으로 일하게 된 조선인 군인, 군속은 ‘적국에 부역한 신민’으로 간주하여 일본인으로서 재판을 받았다. 상관의 명령에 따른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을 면제받지 않는다는 것이 많은 조선인, 대만인의 전범을 만들어 낸 요인이 되었다. 버마 철도(태면철도, 泰面鐵道) 건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 정부가 〈제네바 조약〉을 지키겠다고 연합국 각국에 약속하면서 그에 따른 적절한 처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약에 반하는 명령, 처우, 실행 책임을 말단 군속에게도 물은 것이다. 조선인 전범은 148명 중 군인은 3명이었다. 1명은 홍사익 중장(사형)이었으며, 두 사람은 지원병이었다. 이 밖에 통역병도 있었던 조선인 16명이 중화민국의 국민당 정부에 의해 심판을 받았고, 그 중 8명은 사형을 당했다. 3,016명의 한국인 포로감시원 중 12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들 129명 전원이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징용되어 타이, 자바, 머레이의 포로수용소에 배속된 군속이었다. 이들 중 았으며, 14명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또한, 적국의 부녀자를 비롯한 민간인을 억류한 자바군 억류 장소의 감시에도 조선인 군속이 맡았기 때문에 네덜란드 법정에서도 전범이 되었다. 조선인, 대만인 전범은 일본인이 ‘내지 송환’이 될 때 함께 일본으로 송환되어 스가모 구치소에 수용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일본인 전범은 형집행을 지속하도록 했지만, 조선인 전범 등의 국적이 이미 일본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인과 대만인은 예외로 했다. 따라서 일본 정부에 석방을 요구했지만, 일본의 최고재판소(대법원)는 구금 당시 일본 국민이었기 때문에 형기를 마쳐야 한다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가석방된 조선인 전범은 외국인으로 취급되어 아무런 생활 지원도 받지 못해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가석방 상태라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의지할 기반조차 없어서 온갖 차별에 시달리며 막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았고, 생활고와 비관으로 자살한 이들도 있었다.[1] 한국인 BC급 전범 기소자들은 1955년 4월 동진회(同進會)를 결성하고 명예회복과 일본 정부에 사죄와 보상 입법을 요구하는 활동을 펼쳐왔으며, 60주년이 된 2015년 4월 1일 현재 생존자는 이학래(90세, 일본 동진회 회장) 씨등 5명에 지나지 않는다.[2] 일본 통치 하에서 군무원으로 들어가 전몰자가 된 한반도 출신자 가운데 조선인, 일본군을 포함 약 2만 1000명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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